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암호화폐 거래소의 경쟁은 단순했다. 비트코인 거래량이 얼마나 많은지, 새 코인을 얼마나 빨리 상장하는지가 중요했다.
그런데 최근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글로벌 거래소들이 엔비디아와 테슬라 같은 미국 주식은 물론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한국 주식과 연계된 상품까지 추가하고 있다. 여기에 금, 원유, 외환, ETF까지 한 계좌에서 거래하도록 만들고 있다.
거래소들이 갑자기 전통금융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코인 거래량을 늘리는 것만이 목적은 아니다. 이들은 암호화폐 거래소라는 틀을 벗어나 24시간 운영되는 글로벌 증권사가 되려고 한다.
거래소에 보이는 ‘주식’은 실제 주식일까?
먼저 상품의 정체부터 구분해야 한다.
앱에 엔비디아나 삼성전자라는 이름이 표시되더라도 실제 주식을 매수하는 상품이 아닐 수 있다. 현재 코인 거래소가 제공하는 주식 상품은 크게 다음과 같이 나뉜다.
- 증권사를 통해 매매하는 실제 주식
- 실제 주식을 담보로 발행한 토큰화 주식
- 주가만 추종하는 무기한선물
- 거래소와 가격 차이를 정산하는 CFD
실제 주식은 투자자에게 배당이나 의결권이 주어질 수 있다. 반면 무기한선물과 CFD는 가격이 오를지 내릴지에 투자하는 계약일 뿐이다. 해당 기업의 주주가 되는 것은 아니다.
Bitget은 2026년 6월 Stock+를 출시하며 1만 개 이상의 미국 주식과 ETF 거래를 제공한다고 밝혔다. 이와 별도로 미국·홍콩·한국 주식을 기초로 하는 주식 선물도 제공한다.
Bybit은 미국 주식과 ETF 가격을 추종하는 USDT 기반 무기한계약을 확대하고 있다. 일부 상품은 24시간 거래와 최대 10배 레버리지를 지원한다.
같은 ‘주식 거래’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만 상품의 법적 구조와 위험은 전혀 다르다.
코인 시장에만 의존하면 매출이 너무 불안정하다
암호화폐 거래소의 수익은 시장 분위기에 크게 좌우된다.
상승장에는 비트코인, 알트코인, 밈코인의 거래량이 동시에 증가한다. 거래소는 막대한 수수료를 벌 수 있다.
하지만 하락장이 시작되면 상황이 반대로 바뀐다. 코인 가격뿐 아니라 거래량과 신규 가입자까지 함께 감소한다.
거래소가 주식과 금, 원유, 외환을 추가하면 비트코인이 조용한 시기에도 다른 시장에서 거래를 발생시킬 수 있다.
미국 기술주가 움직이면 나스닥 연계 상품으로, 중동 분쟁이 발생하면 원유와 금으로, 한국 반도체가 주목받으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관련 상품으로 이용자를 이동시키는 구조다.
거래소는 더 이상 하나의 시장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
고객 자금을 플랫폼 안에 묶어두는 전략
기존에는 코인 투자자가 주식을 사려면 다음 과정을 거쳐야 했다.
암호화폐를 매도하고 은행으로 출금한 다음 증권계좌에 입금하고 다시 달러나 원화로 환전해야 했다.
TradFi 상품이 거래소 안으로 들어오면 이 과정이 사라진다. 사용자는 보유하고 있던 USDT로 주식 선물이나 금을 거래한 뒤 다시 비트코인으로 이동할 수 있다.
거래소 입장에서는 고객의 자금이 외부로 빠져나가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암호화폐, 주식, 원자재, 외환을 하나의 잔액으로 거래하게 만들면 고객이 다른 금융 앱을 사용할 이유가 줄어든다. 거래소가 노리는 것은 단순한 거래 수수료가 아니라 고객 금융생활 전체의 점유율이다.
왜 현물주식보다 무기한선물을 먼저 늘릴까?
장기투자자는 주식을 매수한 뒤 오랜 기간 보유한다. 거래가 자주 발생하지 않으니 플랫폼이 벌 수 있는 수수료도 제한적이다.
반면 무기한선물 이용자는 레버리지와 증거금을 지속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가격이 움직일 때마다 포지션을 줄이거나 늘리고, 롱에서 숏으로 전환하거나 손절매한다. 증거금이 부족하면 강제청산도 발생한다.
펀딩비가 전부 거래소 수익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레버리지 상품은 거래 회전율을 높이고 반복적인 수수료를 만들어낸다.
거래소가 실제 주식 중개보다 주식 무기한선물을 공격적으로 상장하는 가장 현실적인 이유다.
USDT가 모든 자산의 공통 통화가 된다
TradFi 확장은 스테이블코인의 역할도 바꾸고 있다.
USDT와 USDC는 원래 코인을 거래하기 위한 대기자금에 가까웠다. 이제는 나스닥 주식, 한국 주식, 금, 원유, 외환을 거래하는 담보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한 이용자가 비트코인을 매도해 받은 USDT로 엔비디아 선물을 거래하고, 포지션을 정리한 뒤 금이나 달러·엔화에 투자할 수 있다.
은행을 거치지 않고 하나의 스테이블코인으로 여러 시장을 이동하는 것이다.
거래소는 이 구조를 통해 예치자산과 거래량을 늘리고, 스테이블코인은 사실상 플랫폼 내부의 기축통화가 된다.
24시간 주식 거래의 함정
암호화폐 거래소가 내세우는 가장 강력한 장점은 24시간 거래다.
한국과 미국 증시가 문을 닫은 뒤에도 관련 토큰이나 무기한선물을 사고팔 수 있다. 실적 발표나 국제분쟁이 발생했을 때 정규시장 개장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하지만 기초 주식시장이 닫힌 시간에는 공식적인 주가가 새로 형성되지 않는다.
거래소 내부의 매수·매도 수요와 가격 산정 시스템에 의존하기 때문에 실제 주가와 차이가 커질 수 있다. 주식시장이 다시 열리면 벌어진 가격이 한꺼번에 조정될 위험도 있다.
24시간 거래가 항상 더 풍부한 유동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전통 거래소도 반대 방향으로 들어오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코인 거래소만 전통금융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Nasdaq, NYSE와 DTCC 같은 기존 금융 인프라도 주식과 국채를 블록체인에서 거래·결제하는 시스템을 준비하고 있다.
2026년 7월에는 세계적인 시장조성자 Citadel Securities가 Crypto.com에 4억 달러를 투자했다. Crypto.com은 투자금을 토큰화 증권과 파생상품 확장에 활용할 예정이다. Reuters
코인 거래소는 증권사의 영역으로 들어가고, 월스트리트는 블록체인 시장으로 들어오는 중이다.
반드시 확인해야 할 위험
주식 연계 상품을 거래하기 전에는 화면에 표시된 종목명보다 상품 구조를 먼저 봐야 한다.
- 실제 주식을 소유하는가?
- 배당과 의결권을 받을 수 있는가?
- 토큰을 실제 주식으로 교환할 수 있는가?
- 기초주식은 어느 기관이 보관하는가?
- 거래소나 발행사가 파산하면 청구권이 있는가?
- 정규시장 종료 후 가격은 어떻게 산정되는가?
- 레버리지와 강제청산 조건은 무엇인가?
미국 SEC도 토큰화 증권이 반드시 실제 주식의 소유권을 의미하지 않으며, 제3자 발행사가 파산할 경우 추가적인 위험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 SEC
코인 거래소의 최종 목적
코인 거래소들이 나스닥과 한국 주식을 추가하는 이유를 거래량 하나로 설명할 수는 없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고객이 암호화폐를 사기 위해 잠시 방문하는 앱이 아니다. 주식, 코인, 외환, 원자재를 하나의 계좌와 하나의 담보로 거래하는 글로벌 금융플랫폼이다.
앞으로 거래소의 경쟁력은 상장된 코인의 숫자보다 다음 세 가지로 결정될 가능성이 크다.
- 얼마나 다양한 자산을 제공하는가
- 자산 사이를 얼마나 쉽게 이동할 수 있는가
- 실제 소유권과 투자자 보호를 얼마나 명확하게 보장하는가
코인 거래소의 TradFi 진출은 일시적인 상품 확대가 아니다.
암호화폐 거래소와 증권사의 경계가 사라지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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